작성일 : 2026.01.30 13:30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하노이에 처음 갔을 때 가장 놀랐던 건 오토바이로 가득 찬 좁은 인도 앞에 사람들이 작은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 놓고 앉아 있는 풍경이었다. 처음엔 그냥 길가에서 쉬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곳은 카페였다. 하노이의 길거리엔 간판 없는 카페가 넘쳐난다. 테이블도 메뉴판도 없지만, 커피는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렇게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하루의 일과처럼 여긴다.

베트남은 세계 2위의 커피 생산국이다. 그 시작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로부스타(Robusta) 품종이 주류로 자리 잡았는데, 이 원두는 카페인 함유량이 많고 쓴맛이 진하며, 입안에 진득하게 남는 여운이 특징이다.
현지 친구에게 슬쩍 물었다. “베트남 커피, 뭐부터 마셔야 해?” 친구는 잠깐 생각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일단 각오부터 해. 베트남 커피는 대체로 진해. 블랙커피는 ‘카페덴’이라고 하는데 에스프레소만큼 진해. 오후에 마시면 그날 밤잠은 포기해야 해. 공부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면 ‘카페덴’이지.”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씩 세며 말을 이었다. “연유 커피는 ‘카페쓰어다’라고 해. 씁쓸하면서 달아서 피로를 한 방에 날려 보내주지. 하지만 이것도 카페인은 만만치 않아.”
“그럼,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땐?” “그럴 땐 에그 커피지.”
‘카페쯩’이라고 불리는 이 커피는 달걀노른자를 거품 내 올린 커피다. 처음엔 비릴 것 같지만 막상 마셔보면 커스터드 크림처럼 부드럽다. 라떼만큼 달고 부드러워서 디저트에 가깝다.
친구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쓴맛에 약하면 괜히 센 척하지 말고 ‘박씨우’를 마셔. 연유랑 우유가 들어가서 제일 순해.” 그날 이후 나는 커피를 고를 때 ‘뭘 마실까’보다 ‘오늘 나는 어떤 상태일까’를 먼저 챙기게 됐다.
베트남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건, 현지인들은 글로벌 프랜차이즈보다 현지 커피 체인이나 동네 커피집을 훨씬 더 많이 찾는다는 점이다. 물론 스타벅스도 있다. 하지만 일상은 아니다. 베트남에서 카페는 커피를 빨리 마시고 떠나는 장소가 아니라 오래 머무는 시간의 매개체로 여겨졌다. 가격, 접근성, 그리고 공간이 주는 느슨한 분위기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 풍경을 보며 자연스럽게 한국의 커피 문화가 떠올랐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커피 소비 국가다. 골목마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줄지어 있고, 접근성과 품질 면에서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커피 소비가 늘어날수록, 커피가 품고 있는 지역성과 공동체성은 오히려 옅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2024년 기준, 한국의 스타벅스 매장은 2000개를 넘어섰다. 미국과 중국 다음으로 스타벅스 매장이 많이 들어선 나라가 됐다. 1인당 매장 수로는 세계 1위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만 해도 아파트 단지 앞에 형성된 상가 골목에 비슷한 메뉴판과 익숙한 인테리어의 커피 프랜차이즈만 여덟 곳이 있다.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가거나 테이크아웃 등
소비는 편리해졌지만, 관계는 얇고 좁아지고 있다.
그런데 몇 달 전, 우리 동네 골목 중간에 작은 개인 커피집 하나가 생겼다. 2층 다락방 구조의 좁은 공간, 문 앞에는 손글씨로 적힌 동네 행사 포스터와 카페 한쪽엔 누군가의 창업 아이디어가 느껴지는 핸드메이드 소품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들은 조용히 책을 읽고, 아이 이야기와 동네 소식이 오간다. 그곳은 자연스럽게 동네 사랑방이 된다.
베트남의 커피 문화가 주는 가장 큰 시사점은 커피를 산업으로 키우기 전에 일상 속에 단단히 뿌리내렸다는 점이다. 이에 동네 커피점은 단순한 자영업을 넘어 지역 커뮤니티 회복과 여성의 사회적 재진입, 생활형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베트남의 노상 카페처럼 우리에게도 커피가 시간과 기억을 품었던 서울의 학림다방, 전주의 삼양다방이 있었다. 문학이 태어나고, 청춘이 앉아 이야기가 쌓였던 공간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말해준다. 커피는 산업이 되기 전에 이미 공동체였다는 것을 말이다. “밥 한번 먹어요” 만큼 “커피 한잔 할래요?”가 자연스러운 인사말이 된 이유는 커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을 머물게 하는 명분이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이 도시를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은 사람을 연결하고, 그 연결은 결국 지역적 특색을 만든다.
오늘도 나는 텀블러를 들고 동네 사랑방으로 향한다. 빠른 소비 대신, 느린 관계를 선택하면서. 어쩌면 지역 정책의 시작은 카페의 매장 숫자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이 동네에 아직 ‘이야기가 오가는 테이블’이 남아 있는지를 살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글·사진 ⓒ 이주영, (전)sbs 미디어 비평 작가, (현)화성시 미디어센터 강사, 한국문학예술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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