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6.01.09 13:24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여주인공들이 컵라면을 젓가락으로 휘휘 젓는 짧은 장면이 나왔을 때, 나는 괜히 웃음이 났다. 추운 날 손끝을 녹이기 위해 먹고, 술 마신 다음 날 해장을 위해 먹고, 명절에 기름진 음식을 잔뜩 먹고 난 뒤 속을 정리하려 먹는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작품에 나오다니 말이다.

베트남 사람들 역시 면을 굉장히 좋아한다. 현지 마트에만 가도 눈이 아플 만큼 색색의 다양한 봉지라면들이 가판대를 차지하고, 한 봉 두 봉이 아니라 묶음으로 구매하는 현지인들의 손놀림을 자주 볼 수 있을 정도다.
2024년,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나라라는 타이틀은 베트남의 것이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1인당 평균 81봉지의 즉석 라면을 먹었다. 한국의 79봉지를 앞선 수치다. 숫자를 보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쌀국수로 대표되는 면 문화의 토양 위에서, 즉석 라면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일상이 되어 있었다.
2010년대 중반, 한류가 음악과 드라마를 타고 베트남으로 유입되던 시기와 맞물려 한국 라면도 함께 스며들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에게 처음엔 봉지에 적힌 한글이 신기했고, 곧이어 국물 맛이 낯설게 다가왔으며, 나중엔 ‘한국 라면은 뭔가 다르다’는 인식이 생겼다. 베트남 라면이 가볍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간식이라면 한국 라면은 더 맵고, 더 진하고, 더 묵직한 한 끼 식사다.
2017년, 하노이에서 ‘빨간 맛’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음식점이 있었는데 바로 ‘사신’이다.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 중 하나인 캐롤라이나 리퍼(Carolina Reaper)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대표 메뉴는 매운맛의 단계를 선택할 수 있는 한국식 라면이었다.
이 음식점이 흥미로운 건 단지 맵기 조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징거미새우, 해산물, 소고기, 생선까지. 라면 위에 올릴 수 있는 재료들이 꽤 자유롭다는 것이다. 국물은 한국식 매운 라면을 기본으로 하지만 맛의 완성은 베트남 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다.
메뉴판을 보며 내가 말했다. “여긴 처음이잖아. 그냥 안 매운 걸로 가자.” 그러자 남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와서 2단계면 너무 약하지 않아? 한국인의 자존심이 있지. 5단계로 가자.” “당신 지난번에도 괜찮다더니 땀으로 육수 한 통 뽑았잖아.” “그건 날씨가 더워서 그랬지.” 결국 우리는 타협했다. “그럼, 3단계로 주문하자.”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순한편이라는 3단계 국물이었지만 이미 혀가 바쁘게 반응했다.
이듬해 일반 국물 라면과는 결이 살짝 다른 한국의 불닭볶음면은 베트남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불닭볶음면이 특별해진 이유는 맛 때문만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Fire Noodle Challenge(불닭볶음면을 활용한 먹방 챌린지) 이후, 이 라면은 ‘먹는 음식’에서 ‘도전하는 놀이’가 되었다.
하노이에서도 풍경은 다르지 않았다. 현지 친구들과 우리 집에 모여 불닭볶음면을 끓였던 날이 떠오른다. 젓가락을 들기 전의 자신만만한 표정, 한 입 뒤에 무너지는 얼굴, 결국 물을 찾으며 웃음으로 항복하던 순간들. 기침과 환호가 뒤섞였던 그날, 누군가는 “한 젓가락 이후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지옥을 맛봤다”고 말했다. 그 말이 딱 맞았다. 이건 배를 채우는 국수가 아니라 함께 반응을 나누는 경험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불닭볶음면의 변신도 더욱 화려해졌다. 현지 마트 진열대에는 기본 불닭볶음면을 비롯해 까르보나라, 치즈, 핵불닭, 커리, 아이스 불닭까지 줄지어 선보이고 있다. 불닭 소스는 아예 병에 담겨 따로 판매된다. 특히 치즈 불닭볶음면은 베트남 사람들이 사랑하는 치킨, 매운맛, 치즈의 조합을 정확히 건드린 제품으로 반응이 좋다고 한다.
라면이 이렇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음식이 본래부터 유연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나라 고유의 맛과 문화를 조금씩 얹어 변주할 수 있는 음식이라서,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놀이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와 불닭볶음면을 먹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늘은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오는 날이다. 오늘 하루, 호르몬 변화로 인한 사춘기쯤은 이 빨간 맛으로 날려버리라고 나는 자연스럽게 불닭볶음면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우유도 잊지 않고 챙긴다.
라면은 저마다 먹는 방식은 다르지만 누구와 함께, 어디서,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특별해질 수 있는 그런 음식이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이 빨간 맛이, 불닭볶음면이, 그리고 우리의 K-라면이 앞으로도 베트남뿐 아니라 더 많은 세계의 식탁 위에서 오래도록 사랑받기를.
/ 글·사진 ⓒ 이주영, (전)sbs 미디어 비평 작가, (현)화성시 미디어센터 강사, 한국문학예술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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