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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향숙 여성교육] 감정으로 전진하는 싱가포르 엄마

작성일 : 2026.01.06 13:02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국가의 제목이 곧 정체성인 나라가 있다. “마줄라(Majulah, 전진하라)!”

이 한마디 구호 속에는 자원도, 땅도, 인종도 다르지만 “함께 전진하자”는 감정의 기술이 숨어 있다. 싱가포르는 다민족의 차이를 조화로 바꾼 나라, 그리고 그 조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다.

싱가포르의 거리엔 질서가 있다. 그런데 그 질서는 단속의 결과가 아니다. “깨끗함은 시민의 품격”이라는 말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엄마는 아이에게 사탕 껍질을 주머니에 넣는 습관을 가르치고, 청소노동자에게 “Thank you, Auntie”라고 인사하는 법을 알려준다. 그 짧은 한마디 속에 아이는 배운다. 이런 사소한 습관들이 바로 싱가포르의 ‘가정교육 교과서’다. 밥상 위의 질서, 대화 속의 존중, 거리의 예절—교과서는 없지만 배움은 언제나 엄마의 말투로 시작된다.

2024년 사회가족발전부(MSF) 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UN 성불평등지수(GII) 에서 아시아 1위,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여성의 고등교육 진학률은 남성을 넘어섰고, 취업 여성의 65%가 전문직에 종사한다. 이 수치는 단순한 경제지표가 아니다. ‘배운 여성’이 ‘가르치는 사회’를 만든다는 증거다. 여성의 교육 수준 향상은 곧 자녀교육의 질적 전환으로 이어졌다. 싱가포르의 어머니들은 이제 ‘시험 대비’보다 ‘감정 다루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스웨덴 사회학자 크리스티나 외란손은 싱가포르 부모를 “교육노동자”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녀의 학업과 정서를 함께 설계하고, 사회 변화에 맞춰 학습 전략을 조정한다. 아침엔 학교 일정을 확인하고, 밤엔 “오늘 기분 어땠어?”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 완벽한 루틴 속엔 늘 불안이 있다. 경경쟁의 압박, 행복에 대한 불확실성,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 그래서 싱가포르의 가정교육은 언제나 긴장과 사랑의 줄다리기 위에 서 있다.

이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는 교육의 방향을 바꿨다. 2023년 개혁안은 “시험보다 창의력, 경쟁보다 협력”을 내세웠고, 유아기부터 ‘놀이 중심 교육’을 확대했다. 부모의 정서적 참여가 자녀의 행복도와 학업 몰입도를 높이고 부모의 사랑이 가장 강력한 학습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또한 “인적 자본이 곧 국가 자원”이라는 철학 아래, 교육을 국가 성장의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 1965년 독립 당시 문맹률은 40%에 달했지만, 정부는 의무교육제와 이중언어정책으로 영어로 세계와 연결하고 모국어로 정체성을 지켰다. 1980년대에는 산업화에 맞춰 기술교육을 강화했고, 2000년대에는 ‘Thinking Schools, Learning Nation’(생각하는 학교, 배우는 나라)정책으로 창의적 사고와 문제해결 능력을 국가 역량으로 길렀다. 그 결과, OECD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읽기·수학·과학 모두 세계 1~2위권, 대학 진학률 90%를 기록했다. 마침내 “작은 나라, 큰 두뇌”의 모델을 완성했다.

이제 싱가포르의 여성들은 이 교육 플랫폼의 운영자이자 디자이너다. 낮엔 일터에서 효율을 설계하고, 밤엔 식탁에서 감정을 가르친다. “Majulah(전진하라)”라는 국가의 모토는 이들의 손끝에서 실현된다. 하루 세 끼의 대화 속에서 인종과 종교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녹이고, 다름을 ‘배려의 언어’로 바꾼다. 매년 7월 21일 ‘Racial Harmony Day’에는 아이들이 서로의 전통 의상을 입고 음식을 나눈다. 다양성은 제도가 아니라, 일상의 학습이 된다.

이 도시가 길러낸 여성들의 얼굴은 다채롭다. 첫 여성 대통령 할리마 야콥은 “질서와 포용은 양립한다”고 말했고, 인권운동가 브리짓 탄은 이주노동자의 손을 잡아 ‘공감의 법’을 만들었다. 요리사 바이올렛 운은 “레시피는 기억의 문법”이라며 음식으로 세대의 감정을 잇는다. 이들은 모두 지식을 넘어 마음을 가르치는 여성들이다.

싱가포르의 미학은 효율과 따뜻함의 공존이다. 회의는 정시에 시작되고, 학교와 병원은 앱 하나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남의 시간을 아끼는 예절”이라는 감정의 윤리가 숨어 있다. 아이들은 이 질서 속에서 ‘배려의 리듬’을 배운다. “시간을 지킨다”는 건 결국 “타인을 존중한다”는 뜻임을 엄마들은 몸으로 가르친다.

물론 완벽한 도시는 없다. 능력주의는 공정의 이름으로 경쟁을 부추기고, 맞벌이 여성의 42%가 육아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감정의 균형으로 이 구조를 완화한다. 학교 교육은 성적보다 공동체 윤리를 가르치고, 지하철 공공미술은 출퇴근길의 무표정을 깨운다. 교육이 삶의 틈새를 치유하는 장치가 된다.

밤이 되면 싱가포르의 부엌, 호커센터의 불이 하나둘 꺼진다. 마지막 설거지 소리와 함께 이 도시의 어머니들은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아이들을 가르친다.

“지식을 전하기 전에 마음이 먼저다.”

/ 글·사진 ⓒ 임향숙, 폭스포럼 대표, (사)지구보존운동연합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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