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6.01.02 13:53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2017년의 뗏이 떠오른다. 설이 다가오면 하노이는 놀랄 만큼 비어 간다. 도시가 멈춘 듯 식당도 약국도 하나둘 문을 닫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우리 가족은 식료품과 비상약을 무려 3주 치나 사두었다. 냉장고와 서랍을 채워 넣으며, 이 도시가 얼마나 오래 쉬어갈지를 그제야 실감했다.

그 무렵, 남편 역시 하노이의 뗏을 처음 겪으며 적잖이 당황했다. 연휴가 끝났는데도 직원들은 새해 인사를 나누느라 자주 자리를 비웠고, 절에 다녀왔다거나 아직 고향에서 올라오지 못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외근은 잦아지고 회의는 자주 미뤄졌다. 남편은 말했다. “일이 안 되는 건 아닌데, 도시 전체가 오랜 시간 명절인 거 같은 느낌이야.” 사무실은 돌아가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설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이렇듯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중심에는 베트남의 설, 뗏(Tết)이 있다. 음력 설을 기준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향한다. 공식 연휴는 보통 3~7일이지만 그 전후로 휴가를 붙여 2~3주씩 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베트남의 뗏은 며칠 내로 끝나는 명절이 아니라, 한 계절처럼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그 시기가 다가오면 거리의 풍경부터 달라진다. 진홍빛 복숭아꽃이 몽실몽실 피어난 나무와 금귤이 주렁주렁 달린 화분이 오토바이 뒤에 실려 지나간다. 이 끝없는 행렬이 시작되면, 베트남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최대의 명절, 뗏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복숭아꽃과 살구꽃, 그리고 금귤나무는 악귀를 쫓고 복을 부른다고 믿어 집 안에 들이거나 선물로 주고받는다. 내가 살던 아파트 로비에도 해마다 커다란 금귤나무가 놓였다. 가지마다 붉은 카드가 달리고, 그 안에는 저마다의 새해 소망이 담겨진다.
베트남의 대표적인 설 인사는 “Chúc mừng năm mới(쭉 믕 남 머이)”, “새해를 축하합니다.” 이다. 곧이어 덕담도 이어진다. “안강성왕(安康盛旺).” 일 년 내내 평안하고 왕성하시길.
“만사여의(萬事如意).” 모든 일이 뜻한 대로 이루어지길.
이 덕담은 곧 리시(lì xì)로 이어진다. 빨간 봉투에 담긴 세뱃돈이다. 한국에선 세뱃돈이 주로 친인척 사이를 오간다면, 베트남에선 주고받는 범위가 매우 넓다. 어른이 아이에게, 상사가 직원에게, 결혼한 사람이 미혼인 친척에게, 심지어 가게 주인이 손님에게 “새해 복 받으세요”의 의미로 건네기도 한다.
나 역시 택시에서 내리며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하차한 적이 있다. 다만 액수가 지나치게 적으면 오히려 실례다. 세뱃돈인 리시는 도움이라기보다 축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 때 가난한 이웃에게 건네도 부담이 아니라 존중이 된다.
한국에선 떡국 한 그릇으로 나이를 먹지만, 베트남에서는 Bánh chưng(바잉쯩)과 Bánh dày(바잉자이)가 한 살을 더해 주는 음식이다. 바잉자이는 녹두와 설탕이 들어있는 둥근 모양의 떡이고, 바잉쯩은 푸른 잎에 싸인 네모난 떡으로 찹쌀 안에 녹두와 돼지고기가 들어 있다. 처음엔 떡 속에 고기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하지만 이 음식에는 베트남식 우주관이 담겨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바잉쯩은 땅을, 바잉자이는 하늘을 상징한다. 또한 떡에 들어가는 쌀, 돼지고기, 콩은 베트남 식문화의 중심 재료로 한 해의 시작을 알린다.
베트남의 설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날’에 가깝다. 바잉쯩은 급히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료를 손질하고, 잎에 싸고, 밤새 불을 지키며 찌는 동안 가족은 번갈아 부엌을 지킨다. 떡을 끓이는 게 아니라 마치 시간을 끓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불 옆에서 가족은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명절을 보낸다.
베트남의 요즘 뗏 풍경은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경제가 성장하고 삶의 선택지가 늘어나면서 가족과 며칠을 보낸 뒤, 남은 연휴는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많아졌다. 실제로 설 시즌이면 항공사들이 노선을 증편할 정도로 여행 수요가 급증한다. 젊은 세대에게 이 연휴는 조상을 기리는 시간인 동시에, 자신을 정비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누군가는 고향의 부엌에서 떡을 끓이고, 누군가는 바다로 떠난다. 또 누군가는 조용한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설의 형태가 무엇이 되었든, 내가 만족하는 쉼의 방향으로 잘 쉬고, 잘 비워내어 한 해의 문을 여는 것. 아마 지금 이 시대의 뗏은 바로 그런 모습일 것이다.
/ 글·사진 ⓒ 이주영, (전)sbs 미디어 비평 작가, (현)화성시 미디어센터 강사, 한국문학예술원 이사
주간 인기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