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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수의 한류이야기] 보고타 밤공기에 스민 한류의 숨결

작성일 : 2025.12.31 16:46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해발 2,600미터, 얇은 공기로 유명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밤공기 속에서 한국어 노랫말이 울려 퍼졌습니다. 2025년 7월 12일, OPA 이벤트 센터에서 열린 제1회 ‘한류 페스타’ 현장은 숫자부터 예상을 넘어섰습니다. 사전 등록 843명, 현장 집계 1,125명. 좌석이 남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더 모여든 자리였습니다. 이 초과 수요는 단순한 흥행 성과라기보다, 콜롬비아에서 한류가 이미 ‘이벤트’를 넘어 도시의 일상적 습관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처럼 읽혔습니다.

행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졌고, 2층과 3층, 입구 공간까지 약 1,700㎡가 온전히 한국문화 체험장으로 채워졌습니다. 한글 캘리그래피와 K-뷰티, 한국 문학과 굿즈 부스가 늘어섰고, 랜덤플레이댄스와 줄다리기 같은 참여형 프로그램은 관람객을 자연스럽게 무대로 끌어냈습니다. 한식과 라면을 맛볼 수 있는 푸드코트, 다이어리 꾸미기와 종이접기, ‘오징어 게임’ 속 놀이 체험이 시작되자 부스 앞에는 금세 줄이 이어졌습니다. 스크린으로 소비되던 한국문화가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참여하는 경험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6세 아이부터 70대 시니어까지, 친구와 연인, 가족 단위의 참여는 한류가 특정 세대의 취향을 넘어섰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입구에서 방문객을 맞은 것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호랑이 캐릭터 ‘더피(Derpy)’ 그래피티였습니다. 현장에서 작업을 선보인 아티스트 로웬(Lowen)은 “한국 여러 도시를 오가며 한글을 배웠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이 장면은 한류가 더 이상 일방적으로 소비되는 콘텐츠가 아니라, 현지 창작자의 언어와 감수성 속으로 스며드는 창작 자원이 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이번 행사가 현지 커뮤니티의 주도로 기획되고, 주콜롬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이 협력해 완성되었다는 점은 더욱 의미 깊습니다. 한국문화원 같은 전담 기관이 없는 환경에서, 한 공간 안에 한국문화를 종합적으로 풀어냈다는 사실은 자발성과 공공외교가 만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풍경은 중남미 전체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이 발표한 ‘2024 해외 한류 실태조사’에 따르면, 해외 한류 경험자의 긍정 인식은 68.8%에 이르며, 미주·중남미 권역에서 K-팝은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한국 이미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한류 콘텐츠 소비 중 K-팝 비중이 약 35%로 나타나, 음악이 한류 확산의 핵심 동력임을 확인해 줍니다.

여기에 글로벌 OTT 플랫폼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플랫폼에서 한국 드라마와 예능은 스페인어 자막과 함께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이는 음악과 언어, 여행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KF)은 2023년 기준 전 세계 한류 팬을 약 2억 2,500만 명으로 추산하며, 멕시코·칠레·브라질·콜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를 가장 역동적인 성장 지역 중 하나로 분류했습니다. 브라질에서는 넷플릭스 이용자의 약 4분의 1이 K-드라마에 관심을 보였다는 조사도 있습니다. 화면 속 이야기로 시작된 호기심이 실제 공간의 체험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보고타에서도 분명히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흐름은 보고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행사 이후 무대는 콜롬비아 제2의 도시 메데인으로 옮겨졌습니다. 한글 이름 쓰기와 전통등 만들기, 딱지치기와 공기놀이 체험, 현지인이 준비한 김치와 김밥을 맛보는 장면까지, 한류는 지역의 일상 리듬에 맞게 재해석되었습니다. 한 참가자는 “배운 등을 집에서도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한류가 ‘낯선 문화’가 아니라,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선택지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보고타에 모인 1,125명은 단순한 관객 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관의 축적, 교육 인프라(세종학당), 플랫폼, 그리고 팬덤의 조직력이 한 지점에서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콘서트가 강렬한 불꽃이라면, 이런 페스타형 한류는 오래 가는 불씨에 가깝습니다. 학교와 문화센터, 한국어 학습, 한식과 관광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번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제도 남아 있습니다.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현지 창작자와의 협업, 장기적인 문화·언어 프로그램, 양국 청년이 함께 만드는 프로젝트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류는 어디에서 변신하고 있을까요? 무대 위의 환호에서일까요, 아니면 이렇게 낯선 도시의 일상 속에서일까요. 보고타의 밤공기 속 합창은 조용히 답합니다. 한류의 다음 물결은 더 크고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서로의 문화를 배우고 손으로 만지며 나누는 생활의 현장에서 자란다고 말입니다. 안데스 고지대의 도시에서 시작된 이 작은 축제는 한류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또렷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하지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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