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5.12.19 18:19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이불 밖은 위험해지고 드라마를 몰아보기에 가장 좋은 계절, 겨울이 왔다. 밖에서 행복을 찾기보다 집 안에서 위안을 찾는 쪽이 훨씬 현실적인 시기다. 리모컨 하나로 넷플릭스를 켜면 드라마 속 멋진 남자 주인공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그래, 겨울은 원래 이래야지.’ 라며 추위를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라마 속 남자에게 마음을 맡기다 보니, 8년 전 하노이에서 현지 친구들과 나눴던 수다 한 움큼이 떠오른다.

2018년 하노이의 겨울밤. 아이들은 집 안에서 놀고 있었고, 한국 엄마들과 베트남 엄마들은 한 공간에 모여 같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 〈도깨비〉 속 공유가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등장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현지 친구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언니, 저런 남자는 현실에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국 남자들 중에서도 상위 0.001%야. 거의 멸종됐다고 볼 수 있지.”
드라마 속 남자들은 늘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말 한마디로 여자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내가 할게.” “네가 먼저야.” “걱정하지 마.”
반면 현실의 남편들은 어떤가. “그래서 뭐?” “내일 얘기하면 안 돼?”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라고 언제나처럼 마음속에 각주는 달아둔다.
하노이에서 한국 드라마하면 유난히 자주 소환되던 작품은 〈도깨비〉였다. 이미 끝난 지 오래됐는데도 겨울만 되면 다시 등장했다. 눈 내리는 장면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배우 공유가 맡은 김신이라는 캐릭터 때문이었다. 베트남 여성들도 그에게 열광했다.
〈도깨비〉 속 김신은 운명을 바꿀 힘을 가졌음에도 여주인공에게 “네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을게.”라고 말한다. 이 장면을 보던 친구 투이는 조용히 말했다. “저게 진짜 사랑이지. 여자 주인공의 삶을 대신 결정하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보호해 주잖아.” 사랑하는 여자를 존중하는 배려와 다정함은 베트남 여성들의 연애 기준을 간간이 흔들곤 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베트남 사회에서 남자는 여전히 가부장적인 이미지가 강하고 감정 표현에는 인색한 편이다. 하지만 김신은 불멸의 존재지만 사랑 앞에서는 서툴다. 강하지만 반면에 다정하다. 이 모순이 하노이 여성들의 마음을 정확히 건드렸다.
하노이에 거주했던 그 시절, 베트남에서 인기를 끌었던 한국 드라마 속 남자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사랑의 불시착>의 리정혁은 여자 주인공을 떠나지 않고 필요한 순간에 곁에 있었고, <태양의 후예>속 유시진은 사랑의 감정을 행동만이 아니라 말로도 표현하는 남자였다.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삶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마지막으로 한국 드라마 속 대부분의 남자 주인공들은 모두에게 친절하진 않지만 내 여자에게만 유독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 드라마 속 남자에게 설레는 이유는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들이 반복해서 이야기한 건 사랑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었다.
흥미로운 건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결혼 여부에 따라 반응이 확연히 다른 건 국적 불문하고 똑같았다. 미혼인 베트남 친구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렇게 말했다. “한국 남성과의 연애는 좀 다를까?” “한국 남자랑 결혼하면 진짜 저래?” 질문은 늘 비슷했고 끝에는 꼭 희망 같은 웃음이 붙어 있었다.
반면 기혼 여성들은 고개를 젓는다. “연애 초반까지만이야.” “결혼하면 다 똑같아.” 기혼자들은 안다. 드라마는 가능성이 아니라 위안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기분을 잠시 드라마 속 남자에게서 빌려 쓸 뿐이다.
한국 드라마에 푹 빠진 외국 여성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힘들 때마다 짠-하고 나타나는 한국 왕자님은 현실에 없지만, 쓰레기 분리수거 하나는 철저하게 해주는 남편은 있다고 말이다.
나 역시 어느새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어진 사람이 되었다. 현실에선 힐보다 슬리퍼가 더 편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이 겨울의 판타지를 조금은 느긋하게 바라본다.
〈도깨비〉 속 김신은 눈 오는 날 나타나지만, 현실의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몸을 맡기고 휴대전화를 붙잡는다. 비록 드라마 속 환상은 없지만 현실의 남자는 하루를 무너지지 않게 버티는 힘이 되어준다. 나와 함께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라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조금 더 너그럽게 그를 봐주기로 한다.
그리고 남자 독자분들께 살짝 귀띔하자면, 힘들어하는 여자친구 또는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당신, 지금 괜찮아?”
/ 글·사진 ⓒ 이주영, (전)sbs 미디어 비평 작가, (현)화성시 미디어센터 강사, 한국문학예술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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