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5.12.08 13:26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베트남 여성들이 꽃을 가장 많이 받는 날은 언제일까? 생일? 화이트데이? 크리스마스? 모두 아니다. 놀랍게도 베트남에선 이런 날들보다 꽃이 더 많이 팔리는 날이 있다.

나는 우연히 10월의 하노이 거리에서 그 사실을 마주했다. 가로수 아래, 오토바이 뒤, 시장 골목골목마다 빨강·노랑·분홍빛 꽃들이 쌓여 있었다.
어느 가을날, 남편 회사 지인의 집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그 집은 베트남인 아내와 한국인 남편이 이룬 다문화 가정이었다. 식탁에 앉은 아내의 손목과 목에서 금팔찌와 목걸이가 반짝였고, 나도 모르게 “잘 어울리세요. 액세서리를 좋아하시나봐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동석한 남편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엊그제가 여성의 날이었어요. 이날은 선물 준비하느라 남자들이 난리가 납니다.” 옆에 있던 아내가 맞장구쳤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버지는 딸에게, 아들은 어머니에게 꽃을 줘요.”
베트남 여성들은 해마다 두 번 크게 축하받는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과 10월 20일, 베트남 여성의 날이다. 후자는 1930년, 베트남 최초의 여성 조직 ‘여성동맹’이 설립된 날이다. 이 조직은 이후 ‘베트남 여성 연합’으로 발전하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여성들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래서 10월 20일은 단순한 축하의 날이 아니라, 베트남 여성들의 역사적인 기여를 국가가 기억하는 상징적인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베트남 여성의 날’의 뿌리에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여성 영웅들의 역사가 있다.
기원 40년경 중국 한나라의 지배에 맞서 싸운 쯩(Trưng)자매의 반란은 베트남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출발점이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독립전쟁, 남북전쟁, 통일 과정을 거치며 활약한 혁명가이자 군인이었던 응우옌 티 딘(Nguyễn Thị Định)은 여성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여성의 사회 참여를 높인 정치 지도자로 활약했다.
베트남은 오랜 시간 독립을 위한 전쟁과 갈등을 겪어온 나라로, 그 역사 속엔 늘 베트남 여성들이 중심에 있었다. 때로는 총을 들고 최전선에 서고, 때로는 가정을 지키며 공동체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왔다.
영웅들은 ‘여성은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렸고 그 용기는 오늘날 베트남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여성들은 시골 논밭에서, 도시의 사무실에서, 집 안과 밖을 동시에 지키며 일한다. 그래서일까? 여행을 가보면 그 분위기를 바로 느낄 수 있다. 할롱베이의 푸른 물결 위를 지나며 만난 뱃사공들 중 많은 이들이 여성인 것만 봐도 그렇다.
내가 하노이에서 만난 여성들도 그랬다. 그녀들은 역사 속 영웅만큼 거대하진 않아도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전사’였다.
시장길 끝 한구석엔 1평 남짓한 공간에서 젖 먹이는 아기를 품고, 미싱 앞에 앉아 옷 수선을 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어서오세요. 수선은 내일까지 돼요’ 손글씨로 적어 붙인 안내문에서 그녀의 절박함과 손님에 대한 예의가 보였다.
좁은 골목에 자리한 작은 마사지샵을 운영하던 사장님은 남편의 실직 상황에도 한국 손님들을 꾸준히 공략해 가게의 규모를 조금씩 키워나갔다. 방문할 때마다 의아했던 점은 그녀와의 대화 속에 불평이나 한탄은 없었다. 대신 묵묵한 현실 인정과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오늘도 살아간다.’는 단단한 태도가 있었다.
그녀들의 조용하지만 우직한 하루하루가 가정과 사회를 버티게 하는 작은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꽃은 시들고 포장지는 버려지며 금팔찌도 언젠간 흠집이 생기겠지만, “우리는 당신을 존중한다”는 마음과 “우리가 기억한다”는 사회적 약속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날은 기념일을 넘어 ‘존경과 연대의 날’로 가치있게 존중받아 마땅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타지에서 언어를 배우고 아이를 키우며 매일매일을 버텨내는 내가, 어쩌면 여기 골목의 그녀들과 다르지 않을 수 있겠구나.’ 개인적으로 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 금이라면 마음이 가지만, 꽃은 며칠이면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날 만큼은 다르게 이 낯선 땅에서 씩씩하게 살아낸 나를 위해, 꽃 한 다발쯤은 사볼까 한다. “꽃은 언젠가 시들겠지만, 그 잠깐의 시간 동안은 내 삶에 생기를 불어 넣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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