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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수의 한류 이야기] K-팝 투어리즘, 여행을 넘어 성지 순례가 되다

작성일 : 2025.12.03 17:22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주말 오후, 하이브(HYBE) 용산 사옥 앞은 조용하지만 설렘이 흐르는 공간입니다. 공연도 없는 날인데 외국인 팬들은 자연스럽게 모여 로고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잠시 머물다 미소를 남기고 떠납니다. 요즘 팬들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티스트의 기운이 깃든 장소를 직접 찾기 위해 서울에 옵니다. 그래서 이곳은 그들에게 여행지가 아니라 작은 ‘성지’가 됩니다.

K-팝 투어리즘이 ‘성지 순례’로 자리 잡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팬들에게 특정 장소는 화면 속에만 존재하던 장면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뮤직비디오에 잠깐 등장한 골목, 연습생 시절 인증샷을 남겼던 카페, 콘서트 직후 팬들이 모였던 통로까지도 팬들에게는 화면 밖에서 이어진 장면처럼 다시 살아납니다. 학계에서는 이를 ‘콘텐츠 투어리즘(content tourism)’이라 설명하며, 콘텐츠 속 공간을 실제 방문함으로써 정서적 결속이 강화된다고 봅니다. 

서울관광재단은 2024년 보고서에서 하이브 용산 사옥이 “외국인 팬 방문 선호도 상위권”에 올랐다고 발표했습니다. 기획사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도시 풍경이 된 것입니다. 한국관광데이터랩도 외래 관광 패턴이 “체험 중심에서 의미 기반 순례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즉, 팬들에게 여행은 관광이 아니라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종의 ‘의식’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성수동에서 더 뚜렷하게 보입니다. SM엔터테인먼트가 이곳으로 이전한 뒤, 성수는 자연스럽게 ‘K-팝 동네’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옥 지하의 ‘광야@서울’에서는 음반과 굿즈, 전시를 한 공간에서 즐길 수 있고, 1층 카페의 유리창 너머로 사옥 내부를 바라보며 “이 공간에서 아티스트가 일하고 걸어 다닌다”는 생각에 감회가 남다른 팬들도 많습니다. 서울시는 2024년 성수동을 K-컬처 관광 동선에 공식 포함시키며 기획사 방문 문화를 체계적인 관광 경험으로 확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기획사 건물 자체가 도시의 문화 시설이 되어가는 흐름입니다.

이제 기획사들은 단순한 ‘회사’가 아니라 ‘팬 경험을 설계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YG의 ‘더 세임(The SameE)’과 JYP의 카페 ‘소울 컵(Soul Cup)’은 단순한 굿즈숍이나 카페를 넘어 소속 아티스트의 세계관을 체험하도록 설계된 공간입니다. 예전에는 팬들이 우연히라도 아티스트를 볼까 소속사 주변을 기웃거리던 시대였다면, 이제는 기획사가 먼저 팬을 맞이하기 위해 공간을 준비하는 시대가 열린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순례’가 공연 유무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국관광공사 조사에 따르면 2024년 외국인 관광객 중 많은 이들이 “K-팝 문화 체험”을 주요 방문 이유로 꼽았으며, 그중 절반 이상은 “공연을 보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이제 K-팝은 공연장이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 경험되는 생활문화가 된 것입니다.

이 변화는 서울을 넘어 지역으로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경북 구미의 ‘봄날’ 버스정류장, 강원도 ‘Butter’ 촬영지처럼 작은 공간들도 팬들의 순례지로 거듭나면서 지자체가 안내판을 설치하고 관광 콘텐츠를 제작했습니다. 작은 버스정류장 하나가 지역의 브랜드 자산이 되는 현상은 K-팝 투어리즘이 단순한 팬 여행을 넘어 지역경제에 실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의 안무를 배우기 위해 K-팝 댄스 클래스를 찾습니다. 에어비앤비에서는 서울 K-팝 댄스 클래스가 2023년 서울 인기 체험 1위를 차지했고, KKday 역시 2024년 예약 증가가 두드러졌다고 밝혔습니다. 영상 속 동작을 실제 공간에서 몸으로 따라 해보는 경험은 팬들의 감정을 현실 세계에서 완성시키는 과정입니다.

결국 K-팝 투어리즘의 본질은 디지털 감정의 현실화입니다. 유튜브와 사진 속에서 수없이 보았던 장면이 실제 장소에서 완성될 때, 팬들은 비로소 그 감정을 ‘정착’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이브 사옥의 계단 하나, SM 사옥의 유리창 하나, ‘봄날’의 버스정류장 하나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낯설지 몰라도, 지금 세계 팬들의 지도에서 파리의 에펠탑과 서울의 하이브 사옥은 비슷한 상징성을 지닙니다. 각각의 문화를 상징하는 ‘감정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을 찾는 팬들에게 중요한 것은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아티스트의 꿈과 하루가 쌓인 공간의 공기를 직접 느끼는 일입니다. 그 공기 속에서 팬들은 자신의 기억을 확장하고 음악 경험을 온전히 완성합니다.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K-팝은 한국의 도시를 세계인의 새로운 순례지로 바꾸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유행이 아니라, 팬들의 마음과 공간이 만나는 방식이 깊어지면서 만들어낸 거대한 문화 변화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도시들은 K-팝을 통해 다시 쓰이는 중입니다.

/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하지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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