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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하노이살이] 좁아도 괜찮아, 인연은 넓어지니까

작성일 : 2025.11.24 13:16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단톡방에서 말 한 번 잘못하면 인생 나락으로 가는 거야.”
“이곳에서 남편이 다니는 회사, 직급 얘기는 금기 중의 금기야.”
“아들이 공부 잘한다고 너무 티 내지마.”

하노이에 처음 왔을 때 들었던 그 경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하노이 한인타운은 작은 한국이었다. 슈퍼엔 한국 라면이 산처럼 쌓여 있고, 삼겹살 굽는 냄새와 김치찌개 냄새는 골목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아이들은 떡볶이집 앞에서 뛰어다니고, 카페에선 한국어가 자연스럽게 들렸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익숙하고 편했지만 묘하게 인간관계만큼은 더 신중해져야 했다.

동네가 좁았기 때문에 30~40분 정도 산책하면 한 바퀴가 끝이 났다. 작은 바람에도 소문이 퍼지고 사소한 대화도 이상한 해석이 얹어져 확대되곤 했다. 김치 파는 아줌마가 벤츠를 뽑았다는 얘기도 들리고, “그 집 아빠 어디 회사 다닌대?” 같은 정보도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 수 있었다. 심지어 “1003호 애는 오늘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싸웠다면서?” 이런 소식도 실시간이었다. 때문에 말 한마디의 실수로 인간관계가 꼬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도 처음엔 반갑다는 마음 하나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여긴 다 이웃이지”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은 사회라고 관계에 대한 규칙이 없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같은 회사 소속이라는 이유로 선을 그었고, 누군가는 내 호의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아는 언니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면서 대화하며 지내던 엄마들에게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우리 애들은 사실 같은 회사 자녀들이라서요. 희준이가 내일 키즈카페에 같이 가는 건 어려울 거 같아요.” 언니는 속상해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애들 어울리는데 무슨 멤버십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문제는 그 뒤로도 그 엄마들을 매일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작은 피로가 쌓인 일이 있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1층 카페에는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난 후 모인 한국 엄마들로 가득했다. 너무 잦은 브런치 모임이 불편해 몇 번 빠졌더니 금세 소문이 따라왔다. “그 집 엄마는 왜 그렇게 안 나와? 뭐 바쁜 일 있나봐?” 괜히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녀들을 피하게 되었고, 거리를 살짝 둔다는 것이 관계를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좁은 만큼 교민사회에서의 관계는 그렇게 까다로웠다. 너무 다가가도 부담이고 너무 안 다가가도 오해가 생기니 말이다.

그런 경험을 겪으며 깨달은 게 있다. 나보다 ‘누구 엄마’, ‘누구 아내’로 소개될 때가 많은 이곳에서는 말을 적게 하는 게 현명한 때가 있고, 거리를 살짝 두어야 평화로운 날도 있다. 하지만 마음을 열어야만 얻을 수 있는 관계도 분명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공통 분모가 없어도, 매일 보지 않아도, 억지로 소속감을 가지려 애쓰지 않아도 좋은 관계는 형성된다는 점이다. 진짜 마음은 의외로 ‘목적이 없는 다가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새벽 두 시, 아이가 고열로 토하며 울던 어느 날. 경비 아저씨는 직접 택시를 잡아주고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요”라고 말해준 순간이 있었다. 하루에 수십 명을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신경 쓸 만한 사람’으로 남았다는 것이 작은 위로로 다가왔다. 그 후 한국에서 가져온 김이나 간식을 종종 챙겨드렸다.

단골 마사지샵 사장님도 그랬다. 강요도 부담도 없어서 서로 안부를 묻는 일이 반복되며 관계가 자연스레 깊어졌다. 얼마 후 내가 맘카페에 후기를 하나 올렸던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가게는 금세 번창했고 확장한 매장의 홍보 문구까지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으로 귀국하던 날, 새벽 비행기 시간에 맞춰 오토바이를 타고 연잎차를 건네러 온 그녀의 마음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아들과 나이대가 비슷한 또래 베트남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시간 역시 지금도 따뜻하게 남아 있다. 말은 서툴러도 표정 하나, 웃음 하나로 아이들은 서로의 문화를 배웠다. 그때 알았다. 관계는 오래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나눴는가로 깊이가 정해진다는 걸 말이다.

함께하고 나서 내가 가벼워지는지, 아니면 감정만 잔뜩 소비하게 되는지 이 둘의 차이는 금방 드러난다. 결국 어느 곳에 있던 나를 지탱해주는 관계는 많이 만난 사람이 아니라 짧은 순간에도 마음을 숨 쉬게 해준 사람이다. 그리고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됐다. 인간관계가 꼭 주류일 필요는 없다는 걸 말이다. 매일 만나지 않아도 되고 소속감을 위해 억지로 맞출 필요도 없다. 정말 중요한 건 시간의 길이보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가 아닐까?

/ 글·사진 ⓒ 이주영, (전)sbs 미디어 비평 작가, (현)화성시 미디어센터 강사, 한국문학예술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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