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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수 한류이야기] 경주에서 본 한류 4.0, 문화가 산업이 되다

작성일 : 2025.11.19 13:09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천 년의 시간이 머무는 도시, 경주가 다시 세상의 중심에 섰습니다. 2025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 경북 경주 화백국제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지속가능한 내일, 연결·혁신·번영”이라는 주제로 인류의 협력 방향을 제시합니다. 회의장에는 21개국 정상과 약 3,000여 명의 대표단이 모였고, 이들이 채택한 ‘경주 선언’은 문화와 기술, 그리고 인간의 창의가 하나로 이어지는 시대의 도래를 천명합니다.

이번 회의가 특히 주목받은 이유는 경제나 무역의 장이었던 APEC이 처음으로 ‘문화창조산업’을 공식 의제로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선언문에는 “디지털과 AI 기술이 창작, 생산, 유통, 소비 전 과정을 혁신한다”는 문장이 명확히 담겨 있어요. 세계 GDP의 61%, 무역의 50%를 차지하는 APEC 회원국이 문화산업을 경제 성장의 축으로 선언했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한류 4.0 시대의 개막’을 의미합니다.

한류의 진화는 단계적으로 분명합니다. 1997년 <겨울연가>와 K-팝으로 대표되는 한류 1.0은 ‘문화 수출’의 시작이었어요. 이후 한류 2.0은 유튜브와 SNS로 확산되며 국경을 넘었고, 한류 3.0은 전 세계 팬이 직접 참여하는 글로벌 플랫폼 생태계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류 4.0은 기술과 생활양식이 얽혀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은 2024년 보고서에서 2022년 이후 한류가 플랫폼, 탐색, 수용의 세 가지 축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즉, 콘텐츠를 ‘소비’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삶의 일상의 일부로 ‘수용’하는 단계로 넘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수치에서도 드러납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을 찾은 외국인은 1,636만 명으로, 팬데믹 이전의 94% 수준까지 회복했습니다. 이 가운데 열 명 중 여섯 명은 K-드라마 촬영지 방문이나 한식·K-뷰티 체험을 목적으로 한국을 했다고 해요. 문화가 더 이상 부수적인 ‘볼거리’가 아니라 여행의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죠.

산업의 성장세는 더 뚜렷합니다. 2024년 K-뷰티 수출액은 102억 달러로 전년 대비 20.6% 증가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합니다. 한국은 세계 3위 화장품 수출국으로 올라섰어요.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콘텐츠 수출이 1억 달러 증가할 때마다 연관 소비재 수출이 1.8억 달러, 생산유발효과는 5.1억 달러, 고용은 약 3천 명 늘어난다고 분석합니다. 문화가 산업의 중심에서 뛰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은행 통계도 같은 흐름을 보여줍니다. 2023년 한국의 저작권 무역수지는 221억 달러 흑자, 2024년 상반기에는 음악·영상 부문에서 6.1억 달러 흑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합니다. 창작이 곧 수출이 되고, 문화가 외화를 버는 산업이 되었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의 발걸음도 빨라집니다. 넷플릭스는 2023년 향후 4년간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에 25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어요. 이는 한국이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콘텐츠 공급의 중심지로 부상했음을 보여줍니다. 웹툰 역시 2024년 기준 월간 이용자 1억7천만 명을 돌파하며, 영화와 드라마, 게임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지식재산(IP) 허브로 성장합니다.

이번 경주 APEC의 문화 프로그램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무대였어요. 한복 패션쇼와 한식 체험, 한지 공예 전시가 함께 열렸고, 서울에 집중되어 있던 문화의 중심이 지역으로 확장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황남빵과 불국사, 그리고 회의장 사이를 잇는 풍경 속에서 ‘문화가 도시를 확장시키고, 도시는 문화를 세계로 내보낸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물론 과제도 남아 있습니다. 회의 직후 박진영 대중문화교류위원장이 시진핑 주석과 인사하는 장면이 공개되며 한한령의 완화에 대한 기대가 커졌지만, 정부는 과도한 해석을 경계했어요. 아직 한한령 해제가 공식화된 것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이 장면이 화제가 된 이유는 단순합니다. 한류는 정치보다 빠르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국 시장이 닫혀 있던 동안에도 한류는 멈추지 않았어요. 중국의 Z세대는 VPN과 팬 번역망을 통해 K-콘텐츠를 우회해 즐겼고, 샤오홍슈에서는 K-메이크업과 K-패션, 한국 여행 관련 게시물이 수억 회 조회됩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중국 내 SNS 조회수 15억 회를 기록했습니다. 정책이 문을 닫아도 문화는 다른 길을 찾아 흐릅니다.

경주는 이번 APEC을 통해 한류 4.0의 출발점을 세계에 보여줍니다. 문화가 외교의 장으로 들어왔다는 점, 그리고 디지털과 창의 산업이 경제 성장의 축으로 명시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회의는 분기점이 됩니다.

중요한 건, 이 흐름을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류 4.0 시대의 진짜 경쟁력은 ‘어떻게 연결하고 함께 성장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창작과 기술, 지역과 세계가 함께 움직이는 체계를 만들 때, 한류는 비로소 다음 세대를 위한 자산이 됩니다.
 

/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하지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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