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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수 한류이야기] 일본을 사로잡은 K-웹툰의 마법 “세로 스크롤”

작성일 : 2025.11.05 13:59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스마트폰 화면을 손끝으로 스르르 내리는 순간, 컷들은 한 줄기 영상처럼 흐릅니다. 일본의 독자들은 이제 책장을 넘기지 않습니다. 페이지 대신 스크롤을 넘기며 감정의 리듬을 따라갑니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한국식 세로 스크롤, K-웹툰의 이야기를 만드는 힘과 플랫폼 산업의 결합이 있습니다.

도쿄 시부야역의 아침을 보면 흐름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출근길에 ‘타테요미(縦読み)’—세로스크롤 만화를 읽으며 하루를 엽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일본 만화의 축은 종이 잡지와 단행본이었습니다. 그러나 2023년 일본 만화 시장 6,785억 엔 중 4,390억 엔(64.7%)이 디지털로 집계되었습니다. ‘출판 제국’이라 불리던 일본이 모바일 네이티브 독서로 이동했습니다.

이 변화를 앞당긴 것은 한국의 플랫폼입니다.
카카오의 피코마(Piccoma)는 2016년 일본에 진출하며 ‘기다리면 무료(Wait for Free)’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한 편을 기다리면 무료로, 바로 보고 싶다면 결제하는 단순한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 일본 독자들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피코마는 2022년 일본 앱스토어 매출 1위를 기록했고, 연 매출은 9,800억 원을 넘어섰습니다. 2023년에는 거래액 10억 달러를 돌파하며 넷플릭스와 애플뮤직을 앞질렀습니다. 그해 상위권에는 〈나 혼자만 레벨업〉, 〈재혼 황후〉, 〈김비서가 왜 그럴까〉 등 한국 웹툰이 자리했습니다.

네이버는 일본 자회사 라인디지털프론티어의 라인망가(LINEマンガ)로 피코마와 양강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2024년 6월 웹툰 엔터테인먼트가 나스닥에 상장하며 기업가치 27억 달러, MAU 1억7천만 명, 그중 한국·일본 합계 약 40%라는 수치를 제시했습니다. 일본은 더 이상 ‘해외’가 아니라 성장의 핵심 무대입니다.

자본의 움직임도 달라졌습니다. 2024년 5월 글로벌 PE 블랙스톤이 일본 디지털 코믹 유통사 Infocom(메차코믹)을 18억 달러에 인수했습니다. 만화가 ‘출판’에서 테크 콘텐츠 산업으로 재평가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세로 스크롤은 포맷을 넘어 서사 문법을 바꿉니다. 일본식 만화가 칸의 정교함으로 정적 리듬을 만들었다면, 한국식 웹툰은 스크롤의 연속성 속에서 감정을 이어 붙입니다. 긴 여백이 숨을 고르게 하고, 클로즈업과 색감이 감정선을 당깁니다. 2023년 피코마 조사에서 일본 사용자 80%가 “세로 스크롤이 더 편하다”고 답했습니다. 독자는 더 이상 텍스트를 ‘읽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스크롤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IP의 확장은 방송가에서도 확인됩니다. 네이버웹툰 〈싸움독학(Viral Hit)〉은 2024년 4~6월 후지TV ‘+Ultra’에서 방영되었습니다. 〈나 혼자만 레벨업〉은 일본 A-1 Pictures가 제작해 도쿄MX에서 방송했고, 2025년 Crunchyroll Anime Awards ‘올해의 애니’를 거머쥐었습니다. 원작은 한국, 제작은 일본, 시청은 글로벌—스크롤에서 스크린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자리 잡았습니다.

현장의 목소리도 변화합니다. 일본 인기 작가 야요이소는 “세로 스크롤을 만들며 일본식 칸 나누기의 틀을 내려놓았다”고 말합니다. 일본 The Japan Times는 “K-웹툰은 로맨스·판타지·스릴러의 유연한 결합으로 즉각적 몰입을 제공한다”고 평합니다. 네이버웹툰 원작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2024년 TV아사히 리메이크로 첫 회 7%대를 기록했고, 〈이태원 클라쓰〉·〈스위트홈〉·〈지금 우리 학교는〉 등도 일본 넷플릭스 상위권을 이어갑니다.

출판 대기업의 전략도 달라집니다. 슈에이샤는 ‘소년점프+’와 MANGA Plus로 세로형 오리지널과 다국어 동시 연재를 강화했고, KADOKAWA·쇼가쿠칸은 웹툰 레이블과 한국식 스토리보드 교육을 도입했습니다. 일본 문화청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신인 작가 35% 이상이 디지털 연재 중심으로 데뷔한다는 통계는 세대 교체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물론 과제도 분명합니다. 피코마는 2024년 9월 프랑스 서비스 종료를 발표했습니다. 포맷의 보편성이 곧 수익의 보편성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현지 소비 습관·결제 문화·유통 파트너십을 버무린 섬세한 로컬라이징이 다음 승부처입니다.

그럼에도 견고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세로 스크롤은 감정의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책장을 넘기던 손끝이 이제 감정선을 따라 스크롤 합니다. 이야기의 호흡은 페이지에서 흐름으로 바뀌었고, 그 흐름의 리듬을 한국 웹툰이 설계합니다.

도쿄의 지하철과 오사카의 카페에서 젊은 독자들은 오늘도 손끝으로 세상을 스크롤합니다. 페이지는 닫혔지만, 이야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오히려 더 깊어졌습니다. 이제 일본의 독자들은 책을 읽는 대신, 감정을 스크롤하며 한국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책장이 닫히고 K-웹툰 스크롤이 열리는 순간, 일본의 독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만화가 아니라 한 편의 드라마야.”

/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하지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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