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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수 한류이야기] 파리는 오늘도 김치에 익어갑니다

작성일 : 2025.10.29 13:15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파리 15구 시청 앞 광장.
햇살이 은은하게 비치던 날, 천막 아래에서는 낯선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파리지앵들이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배추 속을 버무리고 있었습니다. 고춧가루 향에 눈을 찡그리다가도 “오, 스파이시!” 하며 웃음을 터뜨렸고, “이거 네일아트보다 강력하네요?”라며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웃음 속에는 낯섦보다 호기심과 친근함이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행사는 2025년 10월, 유럽 공공기관 최초로 ‘김치의 날(Kimchi Day)’을 제정한 파리 15구의 공식 선언식이었습니다. 김치의 날이라니, 그것도 프랑스의 중심에서라니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의 손끝에 배추가 얹히는 순간, 한국의 겨울이 그들의 가을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발효의 숨결이 광장에 퍼지자,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냄새에 이끌려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날 파리의 공기에는 ‘코리안 스파이스’가 은은히 섞여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발효의 미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나라입니다. 치즈와 와인, 바게트를 사랑하는 이들은 ‘익힘의 시간’을 존중합니다. 김치를 좋아하게 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 셰프는 김치를 버무리며 말했습니다.
“이건 요리가 아니라 철학이에요. 와인처럼 시간이 맛을 완성시킵니다.”

<르 파리지앵(Le Parisien)>은 “한국의 김치가 파리 15구에 자리 잡았다”고 전했고, <프랑스 24(France 24)>는 “김치는 이제 더 이상 이국적이지 않다”고 평했습니다. 파리의 한 카페에서는 김치 크로크무슈가, 레스토랑에서는 김치 파스타가 등장했습니다. 김치가 발효되어 향을 퍼뜨리듯, 한국의 맛도 프랑스의 일상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김치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발효식품 중 하나입니다. 시장조사기관 GMI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김치 시장 규모는 약 45억 달러(6조 원)이며, 2034년에는 65억 달러(9조 4천억 원)로 성장할 전망입니다. 한국의 대표 브랜드 ‘종가’는 폴란드 크라쿠프에 6,600㎡ 규모의 김치 공장을 건설 중이며, 내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CJ제일제당도 프랑스·영국·독일 등 12개국에 ‘김치 쿠킹소스(Kimchi Cooking Sauce)’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김치는 반찬에서 소스로, 밥상에서 조리대 위로 올라섰습니다. 이제 김치는 한국에서 배로 실어오는 ‘수출품’이 아니라, 유럽의 공기 속에서 직접 익는 현지의 맛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은 “한국 김치는 유산균과 식감, 매운맛의 조화가 완벽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유럽 소비자들은 매운맛은 줄이고, 포장은 친환경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비건(Vegan) 인증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유럽 마트에는 “Low Salt”, “Vegan Friendly” 라벨이 붙은 김치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김치는 이제 세계의 식탁 위에서 새 옷을 입고, 새로운 미식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김치의 세계화에는 한류 미디어의 힘도 컸습니다.
드라마 속 밥상, 유튜브 먹방, 인스타그램의 kimchi 해시태그는 이제 김치를 ‘보는 음식’에서 ‘먹고 싶은 음식’으로 만들었습니다. K-드라마를 본 외국인들이 “우리도 김장 해보자!”라며 댓글을 다는 걸 보면, 김치는 이미 세계인이 함께 버무리는 발효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헐리우드 배우 그윈네스 팰트로는 “김치와 스테이크의 완벽한 조합”을 소개했고, 스칼렛 요한슨은 “서울 호텔 조식에 김치가 일곱 가지나 나왔다”며 감탄했습니다. 영국의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은 “딸이 간식으로 김치를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닙니다.
배추와 고춧가루, 마늘과 젓갈이 만나 관계와 시간이 발효된 음식이 되었습니다. 김치를 담그는 일은 결국 “함께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김치는 국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2025년 10월, 독일 쾰른에서 열린 세계 최대 식품박람회 ‘Anuga 2025’에서 한국은 공식 파트너 국가로 초청되어 대규모 K-Food 국가관을 선보였습니다. 100여 개 기업이 참가한 가운데 중심에는 김치가 있었습니다. 미슐랭 셰프 파브리치오 페라리(Fabrizio Ferrari)는 ‘김치 파스타’와 ‘김치 샌드위치’를 즉석에서 선보이며 “김치는 발효의 균형이 완벽한 재료”라 극찬했습니다. 현지 언론은 “한국관이 박람회의 하이라이트였으며, 김치가 이제 유럽의 슈퍼푸드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했습니다.

파리의 마트 진열대에는 김치 병이 반짝이고, 15구 시청 앞 광장에는 ‘김치의 날’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김치는 이제 ‘한국의 맛’을 넘어 ‘함께 익어가는 세계의 맛’이 되었습니다. 파리 15구의 제정은 시작에 불과하며, 내년에는 몽펠리에와 함부르크 등에서도 김치 문화 확산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김치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유럽은 한국 김치의 ‘제2의 고향’이 될 것이며, 각 지역의 감성이 더해진 ‘프랑스식 김치’가 태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때 김치는 완전히 익어, 파리의 어느 부엌에서 이런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자기야, 김치 좀 더 줘!” (“Chérie, Encore du kimchi, s’il vous plaît!”)

/ 글·사진 ⓒ 하지수,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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