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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수 한류이야기] K-라면은 사막의 매운 비명

작성일 : 2025.09.22 20:26 작성자 : 편집부 (iteen2013@naver.com)

“사막 사람들은 매운 걸 못 먹을 거야.”

저도 한때는 그렇게 단정했지요. 그러나 리야드의 어느 대학 기숙사 방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불닭볶음면 한 봉지가 끓기 시작하는 순간, 방 안은 금세 ‘매운 비명’으로 가득 찹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지만, 젓가락은 멈출 줄 모릅니다. 그 모습은 한국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떠들던 청춘들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매운맛은 국경을 모르는 언어였던 겁니다.

K-팝 뮤직비디오 속 아이돌이 라면을 먹는 짧은 장면, 드라마 주인공이 야심한 밤 끓여 먹던 국물. 사우디 젊은이들은 이제 그 장면을 스스로 재현합니다. “나도 한국 드라마 속 주인공 같다”는 설렘이 한 그릇의 라면에 담기는 것이지요. 리야드 대형 마트 한쪽에는 ‘Korean Ramen’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고, 친구와 함께 라면을 끓이며 매운맛에 울고 웃는 순간을 휴대폰에 담아 SNS에 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라면은 이제 값싼 간편식을 넘어, 한국과 연결되는 경험이자 글로벌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25년, 중동에서 K-라면 수출액은 전년 대비 43% 증가했습니다. 무려 5,900만 명의 소비자가 한국 라면을 선택한 셈입니다. 그 중심에는 불닭볶음면과 신라면이 있었습니다. 삼양식품은 불닭볶음면으로 ‘매운맛 한류’를 선도하며 2014년 한국이슬람중앙회(KMF) 인증을 획득했고, 이후 40여 종의 제품으로 라인업을 넓혔습니다. 농심은 부산공장에 할랄 전용 라인을 세우고 신라면을 비롯한 제품을 사우디와 UAE, 카타르 등 4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오뚜기 역시 베트남 박닌 공장에 할랄 라인을 구축해 진라면으로 중동 시장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K-라면은 단순한 한국의 음식이 아니라 할랄 시장을 공략하는 글로벌 상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난 5월 열린 리야드 국제 식품 박람회에서 한국관은 1,200만 달러 규모의 상담 성과를 거뒀는데, 그중 절반 가까이가 라면에서 나왔습니다. 사우디 수출액은 불과 1년 만에 80% 넘게 증가했습니다. 라면 부스 앞은 늘 인산인해였고, 시식용 컵라면을 받아든 청년들은 국물을 한 숟갈 들이킨 뒤 눈을 크게 뜨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Too spicy! But delicious!”라는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 장면은 단순한 시식이 아니라, 한류가 사막을 달구는 생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세계 할랄 식품 시장은 2018년 2조2,000억 달러에서 매년 6.2%씩 성장해 현재 3조2,000억 달러에 이릅니다. 19억 명에 달하는 무슬림 인구가 이 시장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앞다퉈 할랄 인증 제품을 늘리고 현지 맞춤 생산라인을 구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라면만이 아닙니다. 빙그레의 ‘메로나’ 아이스크림도 할랄 인증을 받고 중동에서 인기를 얻고 있으며, 한우는 국내 최초로 할랄 인증을 획득해 UAE로 수출되기 시작했습니다. 라면이 연 길을 아이스크림과 소고기, 그리고 다른 K-푸드들이 잇고 있는 것입니다.

기업들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 역시 ‘K-할랄’ 전략을 세워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기획재정부는 인증 취득에서 생산라인 개보수, 현지 마케팅까지 지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해외 인증기관과의 상호인정을 넓혀 국내 인증만으로도 수출이 가능하게 하고, 인증 비용 부담을 줄이는 방안도 추진 중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장벽은 만만치 않습니다. 국내 한국이슬람중앙회(KMF) 인증만으로는 부족하고, 인도네시아 MUI나 말레이시아 JAKIM 등 각국 기관의 별도 인증을 받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이 들어 제품 출시가 늦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그 문턱을 넘어야만 현지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할랄 인증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신뢰라는 이름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사우디 젊은 세대가 라면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드라마 속 장면 때문만은 아닙니다. 최근 한국을 여행한 관광객들이 귀국 후에도 “한국에서 먹었던 그 라면”을 다시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울 편의점에서, 강릉 게스트하우스 주방에서 맛봤던 매운 라면 한 그릇은 강렬한 추억이 되어 본국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라면은 단순한 간편식이 아니라 한류 체험 상품, 여행의 기억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사막을 달군 작은 그릇은 이제 한류의 다음 장을 여는 신호가 되고 있습니다. 라면 하나의 성공에 머물지 않고 한국 식품이 문화와 종교라는 높은 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리야드 박람회에서 라면뿐 아니라 소스, 인삼, 과자도 주목받았던 것은 K-푸드 전반이 중동으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류는 늘 문화와 산업을 잇는 다리였습니다. 드라마 속 장면이 소비로, 아이돌 광고가 시장으로 이어졌듯, 이제 그 무대는 식탁 위로 옮겨왔습니다.

리야드 슈퍼마켓에서 라면을 집어드는 청년의 눈빛 속에는 한국과 연결되는 설렘이 담겨 있습니다. 그 웃음은 K-푸드의 미래이자 한류의 다음 장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사막 한복판에서 끓어오른 매운 라면 한 그릇은 이제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한국이 세계 식탁 위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방식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하지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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